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콤니노스 왕조 (문단 편집) == 평가 == 이 왕조의 스타트를 연 [[이사키오스 1세]]는 상황이 좋지 않았고 그의 개혁들역시 지지를 받지 못했고 그의 대외 정책은 군인 출신이라 기존 유화적 진로에서 적극전인 진출로 바뀌었다 또 페체네그족을 상대로 원정을 떠난적도 있기 때문에 그가 정치나 재정등의 문제에서는 다소 맞지않거나 무능해 보이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무능한 황제가 아니나 이사키오스는 단 2년만에 퇴위 했고 그때문에 그의 개혁들도 성과를 못봐었기 때문에 그를 명군으로 평하는건 다소 무리가 있다. 이후 1081년 즉위하며 다시 왕조를 창건한 그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1세]]'''는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괴멸된 제국의 중앙군을 키우는데 집중했고 이후 [[레부니온 전투]]에서 부활의 시작을 알렸고 이후 1116년 벌어진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그 성과를 증명하였으며, 이후 십자군을 이용해 아나톨리아 서부지역등을 탈환하며 제국의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제국의 기반을 정비했다. 그 뒤를 이어 1118년 즉위한 '''[[요안니스 2세]]'''는 아버지인 알렉시오스 1세가 힘들게 키운 제국군을 이끌고 여러 원정을 떠나며 승리를 거두었고 안티오크를 봉신으로 삼았지만 사실상으로 안티오크를 수복했고 헝가리를 박살냈으며 또 [[베로이아 전투]]에서 페체네그 족을 섬멸시키다 시피하며 골칫거리중 하나를 없앴고 서방의 상황이 안정되자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며 여러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아버지가 기틀을 마련해준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다. 곧이어 1143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마누일 1세]]'''때 제국은 마지막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마누일 1세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대제에 걸맞게 여러 차례의 원정으로 룸 술탄국을 압박하며 제국이 우위에 있음을 인정받았으며 헝가리를 속국화 시키고 5대 성지중 하나인 안티오히아를 재차 봉신으로 지배하는 등 동서방에 걸친 군사적 성과로 [[바실리오스 2세]] 이후 다시금 부활한 제국의 힘을 사방에 과시했다. 대외적으로는 서방 세력과는 친서방 정책을 펼쳐 서방세력과 우호를 다졌고 신성로마제국과 양대산맥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3대의 현제들 역시 실책이 있었다. 일단 중흥기의 첫번째 황제인 알렉시오스는 제국의 수명을 3백년 이상 늘렸지만 그의 외교정책은 비판할 점도 있다. 일단 그는 좋게 말해서 이이제이 나쁘게 말해서 권모술수적인 외교정책을 폈다. 이 정책은 약화된 제국에게 힘을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힘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었지만 동시에 외교적으로 반감을 샀다. 특히 이런 정책은 프랑스, 독일 등에서 온 십자군 군주들과 갈등을 일으켰고 이는 상호간의 반감을 키워 [[제4차 십자군 원정|제국을 결정적으로 무너트리는 사건]]에 영향을 준다. 마누일 대제 역시 실책이 있었다. 일단 그의 시칠리아 원정이 실패로 끝내며[* 다만 이때의 제국의 경제는 호황기를 맞았기 때문에 이런 원정이 실패로 끝내도 버틸 수 있는 재정적 여유가 있었다.] 재정을 많이 긁었고 그의 야심찬 원정인 룸 술탄국의 동방십자군도 실패로 끝났으며 그의 후계자 문제 역시 실책으로 꼽힌다. 결국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알렉시오스 2세]]는 얼마뒤 [[안드로니쿠스 1세]]에게 찬탈되며 살해당하고 안드로니쿠스 1세는 콤니노스의 명군들이 힘들게 키워온 제국을 부수기 시작하며 대외적으로는 고립되며 서방과도 관계가 악화되었고 수복한 영토도 잃기 시작했고 [[안드로니쿠스 1세]]를 몰아내면서 콤니노스 왕조는 막을 내렸고 앙겔로스 왕조를 연 [[이사키오스 2세]] 역시 전대 황제랑 다르지 않게 제국을 말아먹었고 그의 형인 [[알렉시오스 3세]]는 제국을 살리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인 트롤중 트롤이면서 멍청하기도 한 [[알렉시오스 4세]]가 부른 [[4차 십자군]]으로 [[로마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되었고 후에 1261년 재건했지만 결과적으로 제국은 1만명의 군대를 부리는 것도 휘청거리는 상태로 되며 몰락하고 말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봤을 때 후계 선정을 잘못한 마누일 대제의 책임도 있다. 그는 황위에 위험이 되는 [[안드로니코스 1세]]를 제거하지 않았다. 그의 탓은 아니지만 자식들의 연이은 이른 죽음으로 인해 늦게나마 본 자식인 [[알렉시오스 2세]]가 충분히 성장하여 기반을 쌓을 시간을 벌어주지 못하였다.[* 변명하자면 이미 60세를 넘겼던 마누일과 비슷한 나이에 평생 국외를 떠도느라 정치적 기반도 약한 안드로니코스가 찬탈에 성공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그의 천재적인 선동능력과 기막힌 행운, 섭정인 알렉시오스와 마리아의 형편없는 대응이 겹쳐 끝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후 4차 십자군으로 로마제국이 잠시동안 멸망한뒤 콤니노스의 후손들이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웠지만 [[니케아 제국]]과의 싸움에서 지면서 경제적으로는 부흥했을지 몰라도 작은 소국이 되며 결국 1461년 [[오스만제국]]에게 멸망당하게 되면서 로마제국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끈 콤니노스 왕조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간혹 [[테마 제도]]를 버리고 중앙군을 키우는데 집중한 프로니아 제도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마냥 비판할 일이 아니다. 테마 제도의 장점은 둔전병을 두며 식량을 조달하게 하면서 대량의 군사[* 11세기 초반에는 장부상으로 무려 20만명이나 동원 가능할 정도다.]를 확보할 수 있으며, 해당 지역에 뿌리를 내린 향토군의 특성 상 자기가 주둔한 지역의 수비는 확고히 하게 된다. 이는 제국이 정치적으로 제위가 바뀌는 등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져도 이 체제 자체가 흔들리지는 않으며, 영토 보전에 유리하다. 그러나 이 군사 귀족들은 독자적인 작전권과 공격권 등을 가져 독립성이 강했으며, 따라서 중앙정부의 통제를 자주 벗어났다. 물론 테마의 지휘관은 황제가 임명하지만 점차 군벌화가 되면서 황제에게 반기를 들기도 하고 반독립적인 군대가 되었으며, 콤니노스 왕조 역시 그렇게 성장하여 제위까지 차지하였다. 이러한 지방군 중심의 테마 제도 대신 알렉시오스 1세가 도입한 [[프로니아 제도]]는 쉽게 말해 봉급 지불 제도로 동양의 과전법과 비슷한 제도이다. 이 제도의 유지는 높은 행정력을 필요로 했지만 서유럽과 달리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사회였던 로마 제국에게는 문제가 없었고, 갓 즉위하여 정치적인 안정을 찾고 황제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육성하고자 한 황제는 이 프로니아 제도를 공고히 하였다. 이후 제국은 이 프로니아 제도를 바탕으로 직업군인들을 고용하며 중앙군을 본격적으로 키웠고 콤니노스만의 군대[* 콤니노스만의 군대는 유능한 황제에 의해 작동하는 군대라는 거다.]를 키웠다. 이런 체제의 장점은 테마제도의 단점과 반대로 비교적 충성심이 높아 능력이 뛰어난 황제가 군대에 대한 충분한 통제력을 가진다면 높은 효율과 안정성을 가질수 있었고, 비록 테마제도에 비해 적을지라도 이렇게 키운 중앙군은 마누일 대제때 무려 5만명 이상이나 될 정도였다. 그러나 테마 제도가 중앙의 혼란에도 자체적인 지역 방어가 가능했던 것과 달리 콤니노스의 중앙군은 황제가 무능하면 제국 전체의 방어가 마비된다는 단점을 안고 있었다. 한마디로 뛰어난 황제가 있어야만 유지가 가능한 제도였다. 그러나 콤니노스 왕조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한 시점에서 제국은 그동안의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처였던 아나톨리아를 거의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톨리아가 중심이었던 테마 제도는 이미 붕괴되어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방의 노르만족, 아나톨리아의 투르크족 등 사방이 적이었던 제국의 국방 상황과 절반 이상의 경제력을 상실한 제국의 재정 능력을 고려하면 프로니아 제도는 당면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최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